배준성 작가노트

2013. 5. 20. 02:16EXIBITION/Current 전시중

 

1. 이상한 여행

 

나는 알마 타데마 화집을 보다가 사진기를 찾는다. 사진기를 찾다가 배터리를 충전하려하고, 배터리를 충전하려하다가 충전기를 휴지로 닦으며, 휴지로 충전기를 닦다가 전화를 받고, 전화를 받다가 전화기 옆에 떨어진 세금 계산서를 쳐다보고, 세금계산서를 쳐다보다 은행의 잔고를 생각하며, 은행잔고를 생각하다 어딘가 있을 통장을 찾아 서랍을 뒤지며, 서랍을 뒤지다 예전에 사놓은 옷들을 정리하며, 옷을 정리하다 떨어진 단추를 꿰매고, 단추를 꿰매다 바늘에 손이 찔려 아파하고.... 하루하루가 한 바탕의 이상한 여행이다.


 

2. 관람자로서의 제작자와 제작자로서의 관람자

 

…관람, 평가하는 대상들과 관람자와의 관계는 항시 일정한 원칙이나 룰에 의해 좌우되거나 연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대상과의 느낌이 강한 정도로 말한다면, 그 관계가 불연속적이거나 그간의 시각적 룰에 위배되면 될 수록 그 느낌은 강하고 리얼하게 다가온다. 관람자는 이러한 불규칙적이며 일정치 않은 대상과의 관계를 분노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람자의 그간 경험에서 일탈된 느낌들은 대상에 대한 감상을 더욱 매력적인 긴장으로 위치 이동시킨다. 그러므로 대상을 관람하는 감상-관람자는 이러한 불규칙적인 시간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관람의 시간을 허용-모색하려한다.


 

3. 거울

 

내가 어릴 적에 서울 변두리 극장을 처음 찾은 것은 국민학교 2, 3학년 무렵이었다. 세월에 무르익은 경륜을 자랑하시던 정씨 아저씨에 그려진 거대하고 멋진 극장 간판에 눈을 떼기를 아쉬워하며, 아버지가 주신 표를 구멍 속으로 들이밀고 들어선 잔잔한 실내분위기는 그제야 어엿한 관람객의 자격을 확보했음을 인지시켜준다. 뜨듯한 실내에서 과자나 팝콘 등을 파는 아주머니 옆을 지나 붉은 쿠션 문을 열고, 까맣고 빨간 천을 걷어 젖혀야만 비로소 극장 고유의 분위기를 접할 수가 있으며, 그리곤 나도 모르게 박약스럽게 히죽거리게 된다. 어둠을 발가락으로 더듬거리며 간신히 자리를 찾고 나서야 화면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그 장면에 관한 소리를 들을 수가 있으며, 이미 들이찬 나의 영화선배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들도 발견할 수가 있다. 움직이는 현란한 동영상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몰입하고 앞에서 펼쳐지는 꿈의 세계에 잔뜩 숨을 멈추며, 미친 놈 처럼 울었다 웃었다 한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끝나지 않은 영화를 뒤로 아쉬워하며 또 다른 극장으로 향한다... 이렇게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들을 가슴에 담고 3,4군데의 극장들을 다 돌고 나면 아버지는 회사로, 나는 집으로 터벅터벅 향한다. 하지만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되새겨지는 그간의 영화들은 그때마다 나를 의리 있는 투사로, 또 외로운 화가로, 고독한 박서로, 건방진 천재로, 가난한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니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기보다 나는 실로 의리가 있으며, 외로우며, 고독하며, 건방지며, 가난하며, 그리고 야망이 있었다. 그러니깐 그 영화들은 나의 거울이었다...


 

4. 꿀과 혀

 

부랑하는 풍경들을 맛있게 맛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풍경들에 어떠한 간을 베게 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기위해 나는 풍경 그것에 최대한 양질에 꿀을 바른다. 적당량의 꿀이 요소요소에 베이면 그제서야 음식들은 음미하기 위한 셋팅을 마친다. 그리고 꿀 발린 풍경에 나는 군침이 많이 함유된 부드러운 혀로 이리저리 맛의 여행을 다닌다.


 

5. 화가의 옷

 

나의 그림에 달린 제목은 항시 “the Costume of Painter” 으로 시작된다. 이는 화가가 그리는 옷이란 뜻이기도 하며 동시에, 화가의 눈에 의해 파생된 어떠한 특정한 레이어라는 의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예전부터 화가가 모델을 눈으로 더듬거리며 그릴 적에 화가의 눈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또다른 모델을 탄생시킨다고 믿었다. 하지만 화가의 자의성 언저리에서 그려진(만들어진) 모델은 화가에게 역으로 다시금 새로운 그림그리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의 물리적, 심리적 시간에 의해 발생한다. 결국 나의 “화가의 옷”은 화가가 그리는 옷이 아니라 옷을 그리다가 발생하게 되는 화가의 별안간의 사건을 의미한다.


 

6. 움직이는 정물(moving still-life)

 

그림은 靜物이다. 그리고 그 정물은 動物과 마주하고 있다 정물의 매력은 조용함, 고요함으로부터가 아니라 동적인 에너지를 함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화가는 정물을 움직인다. 그래서 그 그림은 또다시 靜物化된다.


 

7. 렌티큘러

 

어릴 적 책받침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6년을 거의 서기부장으로 지낸 나로서는, 글쓰기를 주무기로 삼았던 나로서는, 당시 나에게 책받침이란 것은 다른 친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주는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적어도 3, 4가지정도의 책받침을 항시 보유하고 있었다. 승부에 예민했던 내가 당시 그렇게도 유행했던 책받침 깨기를 단 한번도 참여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책받침은 나의 보물이었으며, 나의 자존심이었다. 이렇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받침들 중 그중 최고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스마일마크가 정 가운데 보란 듯이 노란빛깔을 띄며 웃고, 또 우는 이른바 “변신 책받침”이었다. 이것이 어릴 적 렌티큘러와(lenticular)의 첫 만남이었다.


 

Bae Jo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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